경마의 구미

##_036, 정의와 진실

전갈의 침 2011. 4. 3. 19:59

##_036, 정의와 진실


첫 번째, 이야기: 기

“옛날에 어떤 갑이라는 한 상인이 살고 있었어요.”

“… ?”

사실 나는 요 며칠 사이 그녀에게 반말과 존대를 함께 썼지만, 이야기에서는 대도록 존대를 했
다. 그것은 그녀가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여 존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
실 부부사이에는 나이나 학력 혹 권위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있을 수도 없었다. 부부란 아내가
남편이고 남편이 아내가 되어 하나가 되는 만큼 모든 것이 샘샘(SAME SAME)하여 평등한 것
이다. 때문에 사랑하는 만큼 존중해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에서 모든 것을 존
중하여 품위와 격식만을 보인다면, 그것은 틀에 얽매이게 되고 생활과 사랑에 영향을 주기 때문
에 오히려 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는 그리 큰 장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되는 밑천을 가지고 조촐히 물건을 받아 이곳
저곳 다니며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겨 생활하는
방물장수였습니다. 또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소유에 따른 책임과 떳떳한 자유의 성품을 지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
죠. 그런 그가 어느 날 마을을 돌고 다시 재를 넘어 이웃 마을을 지나는 길목 한쪽의 허름한 곳
에서 어떤 전대를 발견했는데, 그 전대에는 15냥의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당신은 그 전대
의 돈이 떳떳한 자유의 값에 있어 그의 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잃어버린 사람의 책임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갑의 물건이 될 수는 없죠.”

그녀는 내 말을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찾아주던지 그곳에 놔두던지…, … ?”

“어떤 사람에게 그것을 물었더니 그것에 그대로 나두는 것이 이상 사회라고 해요. 설령 모두가
소유에 대한 책임과 존재에 대한 떳떳한 공존의 값을 갖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나라라도 그것을
그대로 둔다면 이상사회가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돈에는 통화라는 개념이 수반되기 때문이
에요. 만약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잃어버린 그곳을 안다면 다행한 일이고, 또 알면 잃어버리
지도 않았겠지만, 모른다고 가정할 때, 그 돈은 그 사회에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발행
한 만큼 손해를 가져오게 되죠. 그것이 화폐의 발행에 대한 통화가치거든요. 그래서 갑이라는
상인은 그 돈의 주인을 찾아주기로 마음을 먹고 행실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주소도 이름도 없는
그 전대의 재물을 주인에게 찾아주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에
게 물어보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 끝내는 주인을 찾고 말았어요. 그리고 그 갑이라는 상인은
전대의 주인을 보자, 너무나 반갑고, 자신의 의를 다 실천했다는 생각으로 지난 수고를 잊을 수
있었지요. 그 전대의 주인도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전대의 주인 을은 그 전대를 받을 수 없
었어요. 왜냐하면 그 전대의
원 소유자인 을 역시 소유와 존재에 대한 값을 아는 아주 정직한 사
람이기에, 그 전대를 가지고 온 갑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잃어버린 전대 속에 돈의 가치와 갑이
그것을 찾아주려고 노력한 시간의 실증적인 가치가 동일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갑이
찾아 돌려줌을 거절한 것이었지요. 갑과 을은 난처했어요. 갑이라는 상인에게 있어 그 전대의
돈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배우고 생각한 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그 전대의 원 소유주인
을에게 있어서도 그의 선한 마음은 갑의 노고를 생각할 때, 돌려 받을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우기다 결국 관아로 가서 판결을 받기로 합의했
습니다.”

“둘이 반을 나누면 되잖아요. 7.5냥씩”

“그렇게 되면 그들의 선의를 떠나 자신의 단순한 실수로 을은 반을 잃어버린 것이고, 갑 역시
노력의 반을 잃어버린 것이니 그것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 있어서
다른 구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 사건을
그대로 들은 관아의 사또 역시 난처했지요. 그래서 우선 그 전대를 관아에 맡기게 하고 다음날
결정하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지요. 사또는 밤새 그와 같은 류의 판례를 찾고 많은 생각을 했어
요.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사또는 갑과 을에게 판결을 
내렸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
결을 하겠어요?”

“뭐, 반으로 나누던지 서로 안 받겠다면 관아에 귀속시키던지…….”

그녀는 크리스털 그릇의 우유에 섞인 남은 스낵을 마저 비우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Y
잔에 따라 온 위스키를 조금 마시고, 사과 한 조각으로 입을 훔친 후, 그녀를 보며 다시 말했다.

“사또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전대는 관아에서 인수한다. 그러나 너희들의 선한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니 갑에게 상으로 10냥을 주고 을에게도 같은 10냥을 주노라.? 이것이 사
또의 판결이었어요. 즉 을은 15냥을 잃고 그것으로 인해 상으로 10냥을 받았으니 5냥의 손해를
보았고, 갑 역시 15냥의 노동력에 비해 10냥을 상으로 받았으니 5냥의 손해를 봤으며, 사또 역
시 15냥을 받고 20냥을 내주었으니 5냥의 손해를 입었지요.”

“왜, 사또는 5냥을 내주었던가요.”

“사회라는 것은 유기적인 공동체거든요. 그래서 사또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가 있고, 그런 면에
있어 사실 이 판결은 어떻게 보면 아주 공평한 판결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이
야기를 어려서 읽어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이 문제를 무척이나 많이 생각했죠. 제가 우리 시대
정치나 경제 그리고 윤리와 법 등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를 생각한 것도 사실은 여기서 출발한
거예요.”

“어떻게… ?”

“람다값을 배웠죠? 보이지 않는 질서의 값?”

“예, 물리학에서요. 그런데 당신의 푸른곰팡이인 백신 프로그램으로 된 <XCY 사회학>에 나와
요. 이 사회의 경제학…, 아니 그 자체가 우리의 판례적인 헌법에 기초가 되었지만…….”

그녀는 초롱한 눈으로 마치 문제의 열쇠를 기대하는 학생처럼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이
야기를 계속했다.

“그 실체가 바로 이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수치만을 생각하고 가치를 평가
하는 데 있어 모순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을이라는 사람은 전대를 잃은 것이 아니라 기회
비용을 제공하여 갑의 노동력이 있기까지 수많은 소비를 발생시켜 이윤을 챙긴 것인데, 보이지
가 않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갑은 가계고, 을을 기업이에요. 그리고 사또는 정부로써 모두 경
제의 주체가 되는 거죠. 즉, 을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품으로 기회비용을 제공하는 기업이고,
갑은 그것에 대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또가 지불한 5냥
의 손해는 갑과 을의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 정부가 세금으로 받아낸 것을 다시 투자하는 공공
영역의 보험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애초 갑의 노동력은 15냥이고, 갑의 노동
력을 활용하는 을의 아이디어와 상품에 따른 이윤 역시 15냥이거든요. 이것은 당신이 배운 물리
학의 굴절에 관한 물체와 형상의 실체에 따른 배율에 관한 거울이론인데, 제가 경제학에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탁자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 거 울 -
                                I
실상 (갑의 노동)         I

A -------------------+------------------- B

                                     허상(을의 소비이윤) 
  

“여기서 A에서 거울까지의 거리가 실상인데, 그것을 갑의 노동이라고 한다면, B는 허상으로 을
의 소비에 따른 이윤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갑이 을을 찾기까지의 노동이 15냥이면, 을이 갑에
게 기회비용(아이디어, 상품)으로 지불한 15냥의 이윤 역시 소비의 발생으로 15냥이 되는 것입
니다. 즉, 단순히 기업 을이 갑에게 기회비용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이 보이지 않
는 사회의 경제질서인데, 갑과 을의 관계에서 경제의 총 통화는 그렇게 30냥이 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노동의 값과 소비의 값에 차이를 보이는데, 오목렌즈(거울)와 볼록렌즈의 법칙으로 설
명할 수 있습니다. 즉, 실상보다 허상이 작은 오목렌즈의 값은 노동에 비해서 소비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실상보다 허상이 큰 볼록렌즈의 법칙은 노동에 비해서 소비가 많이 발생한 값이라
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람다의 경제법칙이죠. 다시 말해서 경제의 주체는 가계, 기업, 그
리고 정부가 아니라, 가계와 조합정부간의 교환의 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XCY의 교환경
제론이고, 이 사회의 경제원론이며, 시장의 질서거든요. 그런데 우리 시대는 경제의 주체가 가
계, 기업 그리고 정부로 구성되어 갑의 노동량인 5냥이 애매하게 착취된 것이에요. 즉, 사회질
서 안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여러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아담스
미스나 리카도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갑이 을을 찾아오는 동안까지에 노
동은 수많은 사회적 소비행위를 일으켰고, 그로 인해 이미 을은 자신의 이윤을 챙겼기 때문에
사또의 판결은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갑의 행위가 불로소득이 아닌 노동의 수
고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필요한 거지 사또의 판결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
다. 그렇다고 제가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경제의 주체는 가계와 기업간,
가계와 정부와의 관계입니다. 즉, 기업이 정부고 정부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
대는 경제의 주체가 가계, 기업 그리고 정부로 3등분한 것은 바로 권력 때문이었어요. 그 시대
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의 횡포를 막을 수가 없는 그런 구조이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
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경제에 있어서 생산의 삼대 요소인 노동, 토지, 자본에
따른 보이지 않은 부가가치의 창출(람다값)이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수직화 되어 불평등이 발
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자본이 발전하고, 그러한 과
학으로 상식의 단점을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공해(환경), 인명 경시, 소외 등 새로운 문제를 야
기시킬 뿐 전체적인 사회의 정치, 경제, 법(윤리) 등 문화전반에 걸쳐 진보할 수 없는 구조를 애
초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즉, 보이지 않는 람다의 이윤이 착취되어 가는 가운데, 끊임
없이 등분된 불평등이 이뤄지고 끼리와 구별과 분류만이 형성된 것은 한쪽의 굴레를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프랭크교수와 쿠크교수가 쓴 <승자독식사회 -
The Winner Take all Society>라는 책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유에 다른 책임과 존재에 따른 자
유의 공존의 값이 없는 사회구조에서 이긴자만이 모든 혜택을 가진다는 그들의 말이 당연하기
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상품의 가치만을 보아 온 선량한 사람들은 수많이 발생되는 보
이지 않은 람다의 부가이윤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것이 그 시대의 정치권이나 재벌기업들에
게 흘러 들어가도 할 말을 못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한쪽은 무노동무임금의 무지의 논리로 막
걸리의 쪽수만을 채우기에 급급했
고, 다른 한쪽은 그런 공모된 조작의 이론으로 도덕성을 내세
웠죠. 그 사회는 진짜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도
공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Copyright 람다성, 1997년 05월 20일 -


두 번째, 이야기: 승

*** 어머니의 마음(세가지 말씀) ***

하나: 한눈 팔지 말아라.

세상에 살다보면 많은 일을 경험하고 또 그에 따라 대처를 하겠지만 여기 세 가지 책은 그래도
읽고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는 그게 어머님의 "첫 번째 마음 아닐까" 하기 때문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고 이 책은 꼭 읽지 않아도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보다 유리한
인생이 되는 것은 " 예(예수), 하고 그리 도(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니(석가모니)가 붙으니(부타)
마을마다(마호메드) 가서 알려라(알라)" 라는 좀 엉뚱한 상상력이지만 이것으로 증명하고자 한
다.

그리고 스티브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그 내용은

1: 주도적 입장이 되라,
2: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3: 소중한 것부터 챙겨라,
4: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5: 경청한 다음 이해를 시켜라,
6: 시너지효과를 극대화 하라,
7: 심신을 단련하라,"

이지만 앞에 <긍정의 힘>과 함께 한권으로 녹인 책이 있는데 전옥표님의 <이기는 것도 습관이
다.>이다.

* 5째로 나오지만 1번으로 하고 "규범적 사회에 인정, 수긍하고 기본을 놓치지 말라"다. 한마디
로 긍정한 가운데 기본을 정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없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답
은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정한 기본에 동사형으로 총알처럼 움직여라"다. 내일, 모래 이렇게 미루면 뜻을 이루
기 어렵다는 것이다.

* 기본에 자료를 충실히 모으면 그때는 그것을 "구조화하고 재창조하라"고 하는데 철저히 창조
적 고통을 즐겨야 한다는 뜻이다.

* 그리고 그 기본의 구조화 한 것을 다시 쪼개고 분석하여 "지독한 프로세스화 하라"는 말인데
완벽하게 그것에 이치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프로세스화 한 것을 마케팅으로 체계화 하라는 것인데 세상 그 어느 분야라도 전문가
가 되고자 한다면 이 정도는 충분이 넘어야 하고, 정말 남의 것에 투자라도 할려면 마케팅을 밴
치마킹하여 자신의 것으로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한번 설정하고 구조화하고, 프로세스화되어 밴치마킹 된 것은 "끝가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이 책의 모든 것이다.

한마디로 긍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완벽하게 자기 것을 만들어라는 말인데 그게 바로 "한눈을 팔
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작심삼일로 끝나고 나
머지 1%대가 실현한다. 그럼 모두 거지로 살아야 하나?

둘: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지금으로부터 34년 전(1975년) 너무나 예쁘신 담임선생님께서는 그때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
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그 시간 수업을 접고 <빠삐용>에 대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해주셨다.
그런데 이야기 끝에 "지금 단성사에서 몇 달은 계속 상영할 것이니 부모님과 함께 가서 보면 좋
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나는 다시 동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영화관에서 몇 달은 더
상영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동네 제일 좋은 극장도 5일은 넘지 못하는데 말이 되느냐"며 실랑
이를 벌이다 대판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장사가 되는니 안 되느니 하며 4박5일
의 후진 동시상영관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것이다. 나 역시 가난한 집안에 살아 극장에서
보지는 않았지만  정독도서관부터 종로서적을 서재처럼 간 일이라 그때 종로를 걸으면서 6개월
이 넘게 상영한 것을 확인하고 나중에 TV로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본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우물 안에 갖혀 지내는 개구리들과 대화가 되지 않아 내
가 더 도서관과 종로나 교보의 서점들에 빠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모두가 한눈을 팔지 않고 계획을 세워 그것에 규칙적인 습관을 가지고 끝까지 실천하지는 못한
다. 사람마다 다 저마다의 자질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성공하는 사람들에 습
관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훌륭한 선생님을 두었다면 그는 반드시 성공하여 대우를 받는다. 그
것은 한 가정도 한 사람만 성공해도 그 가정이 윤택해 질 수 있고, 사회 역시 그런 천재들이 있
어 그들의 노력에 덕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사회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스승이란 반드시 나이 많은 윗사람일 필요는 없듯이 먼저 앞선 미래를 보고 그런 노력
하는 사람을 만나서 배워야 할 것이다.

셋: 나쁜 놈들과 사귀지 말아라.

*****
와호장룡’으로 2001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대만 감독 리안(李安)에게 기자들이 이
영화를 만든 동기를 물었다. 리안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말했다. “수천 년 동안 중국 문인
들은 협객이 되고 싶은 꿈을 꿨다. 그 꿈을 종이에 맨 처음 적은 것이 ‘사기’의 ‘자객열전’과 ‘유
협열전’이다.” ‘와호장룡’은 1930년대 중국 무협소설을 각색했지만 바탕엔 춘추전국시대부터 등
장하는 수많은 협객들의 정신이 흐른다는 뜻이다.

▶‘사기’에 나오는 영웅호걸 중에 협객의 원조쯤 되는 이가 예양(豫讓)이다. 그는 자신을 보살펴
주던 진(晉)나라 대부(大夫)가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자 “사나이는 자기
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명언을 남기고 복수에 나선다. 리안은 “와호장룡의 주연은
주윤발이었지만 스크린 뒤 주인공은 예양이었다”고 했다.

▶형가(荊軻)는 ‘장사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노라’라는 시를 읊으며 진시황 암살에 나섰다.
중국인들은 그의 의기를 기려 8각13층의 형가탑을 세웠다. 사마천은 협(俠)의 기질을 넷으로 말
했다. 명예와 신의, 그리고 불의에 대항해 약자를 돕는 항폭조약(抗暴助弱),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고결한 행동이다. 협에 빠진 중국인들은 가공의 협객세상 ‘강호(江湖)’를 만들어냈고 당대
(唐代)부터 무협소설을 유행시켰다.

 

                                                                                       조선일보 <만물상-20061219>


과연 인생에서 이런 친구(선,후배 포함)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라면 스스로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책임하에 용기와 모험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나쁜 사람들은
항상 나름에 똥딱지(얄팍한 지식과 습관)를 가지고 계산을 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남에 책
임을 미룬다. 함께 했다간 모든 것에 걸리고 결국 독박을 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님의 말씀(마음)이란?

묘지에서 살았더니 장례식 흉내만 내고 시장에서 살았더니 장사꾼 흉내를 내어 서당 가까이 집
을 정하니 글을 읽고 예의 범절을 알아 사람이 되더라는 유향이 지은 열녀전에 나오는 맹모삼천
지교(孟母三遷之敎)이다.

아니 군대사회는 물론 정치, 사회 등 세상의 전반에 "줄을 잘 서야 성공한다"는 의미나 "친구 따
라 강남 간다" 등 맹모삼천지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 맞는다" 라는 속담이나 " 없는 놈은 있는 것마저 빼았긴다."라는 성경
말씀도 나쁜 쪽의 표현이지만 같은 이치로 다 한가지다.

그러므로 구미(驅迷)란? 좋은 위치 혹 자리를 말하는 것인 만큼 어머님의 마음(말씀)과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웬만한 나라 1년 예산과 맞먹는 콜카콜라의 브랜드(약 430억달러)부터 명품이라고 불리는 루이
비통, 에르메스, 구찌, 까르티에, 샤넬 등 그 가치를 어찌 돈으로 비교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
리는 그런 브랜드가 몇이나 될까? 인고의 세월을 거쳐 노력한 가치를 배울 생각보다 당장 자신
의 몇 푼의 돈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기초자산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도 세상을
이기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떤 이기심인가? 

만 11년 경마를 연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나의 책을 모두 구입
하여 읽고는 그 아픔과 진정성을 함께 해준 분부터 나의 명예가 먹칠을 당하는 그런 말이 나오
자 조용히 보내놓고 술집을 뒤엎어 나의 명예를 지켜 협객의 의리를 보여준 형님까지 면면히 보
면 다 이 세상에서 나름에 유지로 강남에 분당에 그리고 명품의 브랜드를 가진 차를 몰고 땅땅
하게 잘 산다.

그런데 이미 수많은 자료를 보여주었는데도 나름에 얄팍한 수로 이리저리 재고 머리를 굴린다.
이미 그런 똥딱지로 해서 수천 수억을 깨졌으면서도 남의 진정한 노력과 그 상품의 가치를 파악
하고 그 미래의 가치를 생각하기보다 당장에 현실적인 자신의 적은 돈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만큼 미래를 보는 안목이 전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이 자본사회가 그런 미련한 사람
의 돈을 합법적으로 이겨 가져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그게 좀 안타까울 뿐
이지만 자신은 그만한 노력이나 비용에 따른 지불은 안하고 배울려는 의지 또한 없는데 어찌하
랴 ?  

세계인구를 들먹이지 않아도 대한민국 인구 5,000만명을 넘었다. 그 중 사귈 수 있는 성인이 1
천만 명이 넘는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시간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모
든 것을 망친다. 세상에는 자신의 책임을 지지 않는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더 좋은 사람들이 지
천으로 깔려 있듯이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나은 것처럼 그때는 어머님의
말씀처럼 그런 사람들은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올바로 노력한 좋은 기의 사람을 따라
가야 하나 자격지심의 나쁜 습관의 똥딱지가 강한 기의 사람과 같이 하면 대책이 없고 서로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으로 삼투압이고, 구미의 진실이다.

  
                                                       - Copyright 전갈의 침, 블러그, 2008년 11월 14일 -


세 번째, 이야기: 전

세 친구가 등산을 했다. 한 친구는 LEVIS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친구는 LEE를 입고 있었으
며 또 다른 한 친구는 뱅뱅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산에 오르자 비가 왔다. 모두 비에 젖어 텐트
를 치고 바지는 널어 말렸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널린 바지는 뱅뱅 뿐이었다.

  { 양말이나 속옷도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상표를 신거나 입는다. 지금은 누구나 LEX나 폴
로의 독특한 무늬를 발목의 복숭아 뼈 자리에 붙이고 다닌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낯익은 상표
가 붙지 않는 양말을 선택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하다 못해 육교에서 천원에 두세 켤레 하는
양말에조차 도용 된 외국상표들이 붙어 있다. 독점자본 혹 텔레비전의 광고를 할 여력이 있는
중소자본이 제공하는 상품과 상표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가득 차 있다. 아니 포위되어 있다. 포
로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B.Y.C냐, Vic Man이냐> 하는 선택일 뿐이다. 시장에서 남편의
속옷을 고르는 주부들은 이덕화나 유인촌 혹 제임스딘 중에서 불가피하게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다. 자본과 광고 에이전시가 강제한 메커니즘에 의해서 주부는 결국 이덕화나 유인촌 혹 제임
스딘과 <같은 상표>를 입은 남편과 이부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주부들이 보는 여성잡지는 매
호마다 번갈아 가면서 이러저러한 용품이나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특집으로
싣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본문보다 더 두꺼운 컬러 페이지의 광고들이 부추기는 소위 과소비
의 유혹을 이겨낼 참다운 지혜는 독자들에게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는 경지를 훨씬 지나 이제는 상표화, 패션화 되고 있다. <패션가구, 블렉센
스, 하이패션.. 기능보다 멋을, 감성 소비시대, 하이터치에 의한 제품의 차별화> 라는 구호가 등
장한지 이미 오래다. 애들 장난감과 문구용품이 팬시 상품으로 패션화 되어 있고, 담배를 피우
는 것이 아니라 켄트나 말보로를 피우는 것이고,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버드와이저
를 마시거나 독일식으로 레벤브로이를 마신다. 컬러텔레비전을 통한 상품광고는 사실 우리의
일상적 지각과 체험의 틀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광고에 의해 유발되는 주술적 효과에 의해
우리의 욕망은 저 깊은 무의식 안에서 더욱 더 꼬이고 비틀어진다.

  광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품위와 낭만이 있고, 지혜가 있고,  야망이 있으며, 인생의 깊이와
생활의 멋이 있고, 자연과 도시가 함께 숨쉬며, 전통과 혁신이 동시에 있으며, 야성과 지성이 겸
비되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00을 아는 당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어떤
상품을 사야한다. 결국 <앎이란 소비하는 것>이다. <직접 확인하십시오> 라는 광고문구를 따
른다면 소비하는 것은 검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고는 우리 시대의 실천의 보편적 지침이며,
소비는 실천의 가장 본원적인 형태이다. 광고가 이렇게 현대의 신이라면, 욕망은 우리 속에 악
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황무지에 내팽
개쳐버린다. 억압되거나 좌절된 욕망은 상처를 입은 영혼처럼, 아니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상
처를 입은 맹수처럼 우리를 상품의 밀림 속에서 신음하며 헤매게 만든다.}

                                                                           - Copyright  말지, 1993년 8월 27일 -

네 번째, 이야기: 결

왜? 한상렬 목사는 북한에 가서 수백만 민중을 살해하고 천만이 넘는 이재민을 만든 전범 김일
성 묘소를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아들 김정일과 어떻게 해서든 만남을 위해 노력했을까?
결국 묘소에 참배는 했겠지만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김정일은 만남 조차 거부당한 몸으로 판문

점을 통해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런 인간들이 전에도 백 아무개, 문 아무개가 있었다.

왜? "추기경이 대중의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미움이나 부추기는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라고 정의구현사제단은 정진석추기경을 비난을 했을까?

왜? 소망교회 부목사는 주임목사를 폭행했을까?

왜? MBC PD수첩은 왜곡된 보도로 단순한 초불시위를 넘어 유모차까지 나오게 했는지?

왜? 타블로의 진실을 왜곡시켜 타블로를 모함하고 인격을 침해야만 했는가?

전교조의 진실한 참교육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세상이든 부정과 비리가 있다. 또 그것
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60~70%이고 불의에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 60~70% 아니 많게는 80%의 사람들의 진실이 왜곡되는 것은 어떤 세
상이라도 기존의 질서로는 그곳에 투쟁 혹 실력으로 이겨 자신의 신분 상승을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인간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다수의 순수한 참교육을 열
망하는 사람들은 명예나 권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열심히 자신의 직책을 수행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 세력을 만들고 자신의 명예와 신분 상
승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그 판을 조종하고 이용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과거 종교개혁에서 로마의 지키려는 예수회와 루터, 마틴 등 신흥 신교가 탄생한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잘못됐다면 안에서부터 먼저 개혁을 이뤄야 하는데 늘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하고
그것으로부터 더 많은 부정이 개입된다는 것은 오늘날 개신교의 휼륭한 사회 참여도 좋지만 그
렇지 않고 사이비가 더 판치는 그런 것도 역사의 증언이다. 즉 그들은 몇몇의 사람들에 권력의
힘을 원하는 것에 동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진정 민족, 민중, 민주를 위한 올바른 일이었을까? 과연 그들에게는 진정한 성소와
정의가 있을까? 그들은 진정 슈바이처나 이태석신부의 희생은 물론 테레사수녀의 철학을 알까?

군에서 군종으로 일을 했는데 어느 성직자를 준비하는 학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하는 말이
"자신은 이 사회에서 결코 상위사회를 실력으로 들어갈 수 없어 성직을 택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그 사람은 그래도 양심이라도 있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의 어려움, 고통은 보편적인 모습을 띄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결혼하
지 않은 신부가 부부 문제도 상담할 수 있고,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죽는 이를 위로할 수
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감위의 이우갑신부라는 작자도 성추행의 소문으로 사퇘를 하고 자
취를 감추었다. 성추행은 알 수 없지만 신부가 생활의 일반을 알고 상담하는 것에 자신이 무슨
신의 권위쯤 되는 양 하는 것은 성소를 넘어 권력을 지향하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 기초과
학의 변별력을 묻는, 즉 추리를 할 수 있는 삼각함수나 미적분에 수열에 대해는 하나도 모른다
는 것이다. 앞서 생활의 모든 것을 상담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들은 성소와 진리 그리고 정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은 조직을 만들고 광고를 하려는 것뿐이다. 도저히 올바른 사회의 경쟁력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고 올바른 사회의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기보다 조직을 만들고 자신의 편에 서게 하여 힘
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과시하려는 것이지 그들에게는 민족, 민중, 민족은 애
초부터 없는 것이다. 그것에 광고의 힘은 또한 절대적이다. 그래서 쇼맨십도 불사한다. 그리고
아님은 말고 하는 식으로 우리들의 평범하고 소시민적의 삶을 다시 착취하는 것이다. 조직이란
흡인력이 강하여 무소불휘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자본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지식을 가져도 조직과 그에 맞는 광고할 여력이 없다면 무용이 될 수 있는 확
률을 가장 많이 가지는 것이 이 자본사회다. 그래서 실력보다 조직을 만들고 광고를 할 여력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들의 위선은 그런 금전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을
부담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그런 것이 어디 진실이고 정의겠는
가? 우리는 그런 인간들로 인해 이중으로 조세 아닌 조세를 부담한다.

결국 우리는 세 번째장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황무지에 내팽
개쳐버린다. 억압되거나 좌절된 욕망은 상처를 입은 영혼처럼, 아니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상
처를 입은 맹수처럼 우리를 상품의 밀림 속에서 신음하며 헤매게 만든다" 라는 현실에 살아야
한다. 개같은 진실이지만 전갈의 침의 경우만 해도 11년이 넘게 지켜온 사이트를 대한민국 최고
라고 하는 네이버에서 조차 전갈의 침 사이트가 없다. 단순히 밑에 몇 사람들의 불화로 지워진
것이다. 자신들의 사이트보다 오래된 사이트인데도 말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힘으
로 광고로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거대한 집단의 네이버를 찬양하지만 결코 세계속
의 주인은 못될 것이다. 네이버가 해외에서 고전하고 적자를 내고 물러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실과 정의가 없고 광고와 조직의 힘으로 이끌어가고 앞서 말한 그런 것을 동조하는 사람이들
이 끊임없는 쇼맨십이 일어날 수록 우리들의 신음은 더욱 크고 거세질 것이다. 결국 모두가 파
탄나겠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모두가 바라고
모두가 만족하며 함께 더불어 잘 살 수있는 추상의 사회가 아니라 그렇게 올바로 살아야 모두가
유익한 그런 사회를 위한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계속 끊이없이 그런 선전,선동에 살아
야 한다. 아주 끔찍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경마쟁이들에게 지천으로 깔려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다. 

                                                - 아직도 꺼지지 않는  도서관의 불을 사랑하는 전갈의 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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